[담양 마을길이야기] 23. 순한 마을 길이 그리울 때
[담양 마을길이야기] 23. 순한 마을 길이 그리울 때
  • 담양자치신문
  • 승인 2023.11.27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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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길 산길 들길은 절로 시인이 되게 한다
금성면 대성리 봉곡마을길 / 김정한 사진작가
금성면 대성리 봉곡마을길 / 김정한 사진작가

23. 순한 마을 길이 그리울 때(이야기를 마치며)

 

길을 걸었다. 새벽 일찍 물안개 피는 습지에 나가 앉아 있기도 했고, 보름달 뜨는 풍경을 바라보기도 했다. 담양의 마을 가는 곳마다 많은 개울과 나무를 만났다. 여름엔 고마리가 하얀 웃음을 쏟아내고, 가을엔 물억새가 은발을 휘날리는 개울가 둑길을 걷는 것은 잔잔한 행복이었다. 영산강 시원지 담양은 골짝마다 물길이 있고 대숲이 있고, 마을마다 으레 개울을 품고 있다. 개울 따라 논둑길 밭둑길이 생겨났다. 우리 고장의 높지도 않은 산, 넓지도 않은 강, 순한 개울가를 따라 마을이 생겨났고, 사람들은 마을마다 나무를 심었다. 앞들에서 일하던 사람도 하늘을 날던 새도 나무에서 쉬고 다시 논둑길로 하늘길로 삶을 이어왔다. 세상은 변해서 나무보다 전신주가 많아지고 도시로 떠난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나무는 빈집을 지키고 개울은 마을을 휘돌았다.

 

아침에 한적한 길을 가면 가장 많이 만나는 것은 새들이다. 새들의 노래를 들으면 마음이 맑아지고, 순한 삶을 바라보노라면 마음도 따라서 순해지는 것 같다. 독수리가 되어야만 살아남는 건 아니다. 물병아리나 오리들도 자연의 적자가 되어 얼마든지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다. 새들이 분홍빛 발 갈퀴를 뻗으며 물 위에 내리면 물방울들이 그 경쾌한 착지를 박수를 튀기며 환호한다. 고니 떼가 노을 한쪽에 점묘를 찍으며 날아오르면 늪 위를 지나가던 바람도 하늘로 따라 오른다. 새들의 사는 일이라고 멀리서 보듯 녹녹하지는 않겠지만, 습지의 새들은 사납게 굴지 않아도 사는 법을 알고 있다. 어떻게 함께 날개를 움직여야만 큰 바다와 대륙을 건너 새로운 물가를 찾아갈 수 있는지 너무나 잘 안다.

 

천천히 걷는다. 혼자면 더 좋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천천히 걸으면 새들도 보이고 들꽃도 보이고 바람도 보인다. 작정 없이 걸으며 풍경에 마음이 얹히는 것을 바라보다가 가기 싫으면 그냥 말면 된다. 혼자 걷는 길은 내 안에 갇힌 수많은 나를 하나씩 꺼내 보고 다독여주는 시간이기도 하다. 어느 날은 개울가에 논병아리니 원앙 같은 작은 새떼들이 이쁘게 모여종종거리는 모습에 배시시 웃기도 하고, 어느 날엔 텅 빈 들판에 쓰러질 듯 휘날리는 억새를 바라보다 꺼이꺼이 속울음이 올라오는 날도 있다. 밭일하던 아낙이 쑥 뽑아주는 무를 황금이라도 얻은 냥 소중하게 안고 돌아오기도 한다. 물길 산길 들길은 사람을 절로 시인이 되게 한다.

 

전라도 장흥 앞바다가 무수한 소설가들을 키워냈다면, 담양의 물길은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발길을 끌어들였다. 봉산면 삼지리 습지길은 무정면에서 내려온 오례천 물줄기와 가사문학면에서 시작되어 창평면을 지나 흘러온 증암천이 담양읍을 관통해 내려오는 영산강 물줄기와 만나는 합수지다. 증암천을 따라가다 보면 송강정에 이르고, 오례천을 따라가다 보면 면앙정에 이른다. 계속해서 거슬러 오르다 보면 식영정에 이르고 소쇄원에 이르고 독수정에 이른다. 자동차도 없던 시대에 호남의 옛 선비들은 이렇게 천천히 길을 따라 마음의 흐름을 느끼면서 누정까지 거슬러 올라 작은 고장 담양에서 호남가단을 형성했을 것이다. 그 전통이 최두석, 고재종, 손택수 등 이 시대의 쟁쟁한 시인들을 다시 배출해내었다.

 

어디 이름난 누정 뿐일까. 마을마다 이런 순한 풍경이 바라보이는 모정이 있고, 바람과 달을 불러들이며 한낮의 피로를 쉬는 사람들의 마을에 봄에는 매화꽃이 피고, 여름에는 느티나무 초록 그늘이, 가을에는 단풍이 물들다 가고, 마침내 겨울이 깊으면 눈 덮인 앞들에 흔적만 남은 길이 한줄기 선으로 뚜렷해질 것이다. 겨울새들의 삶이 변함없이 이어지듯이 길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소박한 정자 하나가 사방의 모든 풍경을 담아내듯이 비워냄으로 내 안에 소통의 길이 열리는 작은 순간들을 경험했다. 삐뚤빼뚤한 흙돌담길을 걷다가 반쯤 열린 대문을 기웃거려보고 싶었고, 노랗게 단장한 담장길에서 희망을 만나보기도 했고, 언제나 반가운 관방제림 노거수의 거친 표피를 오래 만져보기도 했다. 두고 온 고향의 오랜 추억 속으로 걸어갈 낡은 섶다리 하나, 마을의 역사를 이야기해주는 돌담길, 감나무 익어가는 언덕길 하나하나가 너무나 소중한 풍경이었다.

 

대나무숲길이 있어 천년담양의 정체성을 얘기할 수 있고, 물억새 하얀 울음을 쏟아내는 습지길이 있어 겨울 찬바람을 가르는 고니들의 힘찬 날갯짓을 바라볼 수 있다. 늘어가는 빈집들이 지키는 마을에서도 길은 아직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 겨울, 다시 찾아오는 고니들처럼 우리도 추억의 길을 찾아 걸어볼 일이다. 우리에게 돌아갈 길이 있다면, 미래의 아이들에게 들려줄 이야기도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글: 문학작가 심진숙(沈眞淑)
글: 문학작가 심진숙(沈眞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