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 마을길이야기] 20. 장동마을 시와 사랑의 길
[담양 마을길이야기] 20. 장동마을 시와 사랑의 길
  • 담양자치신문
  • 승인 2023.10.26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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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계정 호수 나무 그늘 따라 걷는 미암 마을길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 장동마을 길 / 김정한 사진작가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 장동마을 길 / 김정한 사진작가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 장동(獐洞)마을은 고려 공민왕 때(1352년경) 평강채씨가 터를 잡고, 편안하고 양지바른 곳이라고 해서 오랫동안 안양동으로 불려 왔다. 장동(獐洞)은 노루골이라는 뜻으로 마을 뒷산인 매봉 아래에 노루 형상을 한 봉우리가 있다고 해서 부르게 되었으며, 사투리로 변형되어 주민들 사이에서는 노랑굴로 불리기도 한다. 지금도 어른들은 윗마을을 노랑골’, 아랫마을을 안양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을 앞에 있는 느티나무는 평강채씨가 입촌할 때 심었다는 나무로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겨 지금까지 꾸준히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그가 생전에 살았다는 담안논과, 마을에 아홉 사람의 출중한 사람이 배출되어 금의환향할 때마다 솟대를 꽂았다는 구달밭이 있다. 아홉 인재가 낫다고 해서 한때는 마을 이름이 구화동으로 불리기도 했다.

뒷산 매봉은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며, 이곳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마을 입구 호수를 아름답게 채운다. 마을 동쪽으로 표고 250m 지점에는 용머리라 불리는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 밑 큰 바위에는 용의 발자국이 지나간 흔적이 있으며 용의 발톱 형상에 해당하는 용머리골이 마을 뒤편을 감싸고 있다. 마을로 흘러드는 맑고 아름다운 계곡을 미암 유희춘이 연계(聯溪)라 이름 지었다. 연계는 미암의 별호이다.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는 미암이 후학을 가르쳤다고 전해지는 연계정(蓮溪亭)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이 바로 미암일기를 저술한 조선의 기록왕 미암 유희춘과 여류시인 송덕봉 부부가 말년을 헤어지지 말고 살자고 다짐하던 자리이다. 미암은 을사사화와 양재역벽서사건으로 함경도 종성 등에서 19년의 귀양을 살았으니, 오랜 세월을 나뉘어 살아야 했던 미암과 덕봉 부부는 이곳에 함께 살 집을 지으면서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하늘은 이 애절한 부부의 언약과 사랑을 끝내 지켜주지 않았다. 선조 임금의 간곡한 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엄동의 날씨에 한양 벼슬길을 떠난 미암은 궁궐 앞에 당도하자마자 입궁도 못 하고 쓰러져 끝내 일어나질 못했다. 함께 살 임을 잃었는데 양지바른 땅 좋은 집이 무슨 소용 있으랴. 슬픔에 빠진 덕봉도 미암이 쓰러진 지 8개월 만에 그 뒤를 따르고 말았다.

호수 속의 나뭇가지들은 몇백 년의 시간을 부유해온 슬픔을 매달고 잠겨있는 듯하다. 땅 위에 뿌리를 내리고 굳건히 서 있는 나무들도 남모르는 슬픔을 저렇게 간직하고 있는 것일까. 조선 중기 시절에 스스로 남편을 택하고, 문학을 통해 남편과 동등한 지위를 확보했던 덕봉의 기개와 담대함 뒤에 숨겨진 애절한 사랑 이야기는 연계정 호숫가에서 이렇게 아릿하게 번져 온다. 호수에 비친 나무들을 가만히 바라보노라면 나무들이 시를 읽고 있는 것 같다.

노루골의 아름다움은 호숫가가 다가 아니다. 언제나 사립이 열려있는 미암 사당 마당을 한 바퀴 둘러보면 종가의 오래된 농기구며 낡은 살림살이들이 편안하게 다가온다. 세월 묵은 마당의 바위와 잘 정리된 잔디밭을 지나 사당 앞에서 잠시 묵념하고 돌아서 나오면 또 오시우~ 하고 종부께서 손을 흔들어준다.

사당 뒤쪽으로 이어지는 마을 숲길 위에는 나무가 그림자를 뻗어 그려내는 긴 무늬들이 마중한다. 햇살과 그늘을 인 마을 숲길은 몇 구비를 휘어지며 한동안 이어진다. 이 오솔길을 미암과 덕봉이 함께 걸었을까 상상해본다. 양지바른 마을에 집 한 채 짓고 남은 생은 헤어지지 말자고 언약했건만, 이루지 못한 꿈만 남아 호수에서 길 위로 이어지고 있다.

사랑이 크면 슬픔도 크다 했던가. 햇살이 좋을수록 그림자는 선명하다. 담장에도 길 위에도 햇살이 그려내는 그림자의 무늬들이 선명하게 살아난다. 그늘 속으로 들어가니 무늬는 다시 햇살로 바뀐다. 그늘 사이로 살짝살짝 비추는 햇살의 무늬 또한 참 곱다. 햇살 아래 비추는 그림자와 그늘에서 보이는 햇살 모두 우리가 가는 길 위에 펼쳐지는 의미 있는 그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나무들이 시를 읽는 호수에서부터 그늘과 햇살의 변주가 시처럼 이어지는 노랑골의 길을 꼭 걸어보자. 가을이 익어가는 시절에는 더욱 시의 그늘을 걸어볼 일이다.

 

▶다음호에 계속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글: 문학작가 심진숙(沈眞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