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 마을길이야기] 18. 시와 소리가 깃든 지실마을길
[담양 마을길이야기] 18. 시와 소리가 깃든 지실마을길
  • 담양자치신문
  • 승인 2023.09.22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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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 사이로 김소희 명창 소리가 울려 오는 듯…

5부 시와 소리의 길
18. 시와 소리가 깃든 지실마을길
가사문학면 지곡리 지실마을길 / 김정한 사진작가
가사문학면 지곡리 지실마을길 / 김정한 사진작가

 

가사문학면 지곡리 지실마을은 조선조 선조 때 연일정씨에 의해 개척된 마을로, 이 마을에 살아온 연일정씨를 지실정씨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실마을에는 당산나무 세 그루가 있다. 할아버지 당산과 할머니 당산 두 그루는 은행나무인데, 죽으면 또 옆으로 대목을 심어서 이었다. 또 한 그루는 느티나무인데 할아버지가 첩을 얻었다고 해서 첩당산이라 하며, 세 당산 모두에게 정월 대보름이면 당산제를 모셨다.

첩당산은 식영정 앞에 서 있는 느티나무이고, 할아버지 당산은 마을 가운데 회관 앞에 서 있는 350년 된 은행나무이며, 할머니 당산은 마을 북쪽 끝에 있는 은행나무인데 전란으로 여러 번 고사하여 대목을 이어 왔다. 이렇게 팔자가 센 세 그루 당산나무가 지키고 있는 지실마을은 나무만큼이나 사연이 많은 마을이다.

 

첩당산이 서 있는 식영정은 이른바 성산4(星山四仙)이라 일컬어지던 고봉 기대승과 하서 김인후, 제봉 고경명, 송강 정철이 식영정 20영을 비롯한 시가를 읊던 곳이자, 정철이 가사 문학의 백미인 성산별곡을 창작한 곳이다.

식영정에서 가사문학관 뒤쪽으로 이어지는 돌담길 초입에는 수풀 우거진 집 하나가 보이는데, 이곳이 바로 일제 강점기 엄혹한 문화통치 시기에 소리꾼들이 모여 우리말로 소리를 이어갔던 지실 초당이다. 관리의 어려움 때문에 원래의 초당 모습으로 복원하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초당이라 부른다.

일제 강점기 예술가들의 후원자 박석기는 민족혼을 지키는 길은 우리 소리를 이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창작판소리로 유명한 박동실 명창을 데려다 제자들을 가르치게 했다. 박석기가 사랑했던 김소희 명창이 여기서 박동실에게 소리를 배웠다.

해방 후 박동실은 월북을 해버렸고, 박석기는 그해 지병으로 죽었다. 월북한 박동실은 아무도 입에 올릴 수 없는 사람이 되어서 잊힌 이름이 되어 버렸다. 담장 사이로 울려 퍼졌을 박동실, 김소희 명창의 소리를 상상하면서 골목길을 걷는다. 시대의 그늘에 가린 가슴 아픈 이야기에 숙연해진 마음으로 담장길을 걷다 보면 김소희 명창의 구슬픈 구음 소리가 골목 사이로 길게 울려 오는 것 같다.

골목에는 나무들이 많다. 담장과 나무들이 만나 그려내는 그림은 아름답고,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던 어느 시인의 글귀가 생각난다.

 

골목 끝에는 당산이 아니지만 당산보다도 더 큰 느티나무가 울울한 그늘을 드리우고 서있다. 이 느티나무에서 좌측으로 모퉁이를 돌아보면 계당(溪堂)이 보인다, 정철 시인의 후손들이 쓰던 사랑방인데, 정철의 시가 보존된 곳이다. 그래서 지실 돌담길은 진정한 시와 소리의 길이다.

다시 돌담이 이어지는 골목을 걸어가 마을회관 앞의 거대한 은행나무 당산 아래 선다. 가을이면 은행나무 한 그루로 마을 광장이 온통 샛노랗게 물이 든다. 이 당산이 할아버지 당산이다. 수령 300년이 훨씬 넘었는데도 아직도 정정하다. 6·25 전란으로 마을이 불탔을 때도 이 당산나무는 끄떡없었다. 천 세까지도 사실 것이다. 이 골목길 담장도 그때까지 남아있을까. 그러길 바란다. 시와 소리도, 초당도

다시 또 돌담을 돌아 북쪽 뒷골목 할머니 당산을 찾아간다. 할머니 당산은 할아버지 당산에 비해 작고 초라하다. 아무래도 마을 바깥쪽 북풍받이에 있다 보니 찬바람도 많이 쐬고, 전란에 화도 많이 당하고 해서 불타거나 병들어 죽곤 했을 것이다. 그때마다 대목을 심어 이어 온 것이다. 당산들도 팔자가 편하지 못하다. 무릇 생명 가진 것들 치고 쉽게 살아지는 것들이 없는 것 같다.

 

이렇게 첩당산부터 할아버지 당산과 할머니 당산까지 돌담을 따라가면 시와 소리가 깃든 지실마을 길을 걸을 수 있다. 식영정과 가사문학관만 보고 가지 말고 꼭 마을 안 돌담길을 걸어보자. 돌담과 나무들과 사연이 어우러져 정취가 물씬한 시와 소리의 길이 숨어있다.

 

다음호에 계속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글: 문학작가 심진숙(沈眞淑)
글: 문학작가 심진숙(沈眞淑)